제2부 중세의 음악 4. 자유학예와 무지카
자유학예와 무지카
• 시대 개념어로서의 중세
서양 음악사에서 우리가 현재 중세라고 부르는 시기는 일반적으로 450년경(또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보기도 한다)부터 1450년경까지 약 천여 년의 시기를 말한다.
중세(Middle Ages 또는 Medieval period)라는 명칭은 본래 바람직한 의미로 사용되었던 말이 아니다. 이는 자신들의 시대에 와서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영화를 다시 부활시켰다고 자부하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바로 이전 시대를 정체되고 비진보적인 시대라는 의미로 중간 시대, 즉 중세라 칭한 것이다.
이 중간 시대의 예술양식을 지칭하는 고딕(Gothic)이라는 명칭도 야만족이던 고트(Goth) 족에서 유래된 말로, 이 시대의 예술을 자신들의 가치 기준에서 평가했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에 의해서 ‘야만적’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용어다. 물론 이 같은 부당한 명칭들은 르네상스 인들의 지나친 우월성에서 비롯된 오해로, 중세 동안에도 많은 문화적 활동과 학문적 진전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고대세계의 학식을 보존하고 필사본들을 통해 그것을 르네상스의 학자들에게 전한 것은 중세인들이었다.
이와 같이 중세나 고딕이라는 명칭은 원래 그 시대나 양식을 평가 절하시키는 의미로 붙여졌지만, 이제는 단순히 시대 개념어로서, 그리고 양식 명칭어로서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중세에 완전히 발전된 교육 제도의 일반 교양과목은 일곱 개의 자유학예(artes liberales, 영어로 liberal arts)로서 트리비움(trivium, 3학과)과 콰드리비움(quadrivium, 4학과)의 두 단계로 나뉘어져 있다.
일곱 개의 자유학예.
기본 교과과정인 트리비움(또는 arts triviales)은 문법·수사학·논리학으로 구성되는 인문학의 세 과목이며, 그보다 상위 단계의 교과과정인 콰드리비움(또는 artes reales)은 정수론·기하학·천문학·음악으로 구성되는 자연과학의 네 과목이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교육체계로부터 유래된 자유학예(라틴 어 liber는 ‘자유’를 의미)는, 목수일이나 건축술처럼 노예에 의해서 행해지는 직능적인 기술(artes mechanicae)에 상반되는 것으로, 자유인들, 즉 살기 위해서 일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추구할 수 있는 과목들이라는 의미에서, 또는 감각의 지배로부터 인간이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고안된 학과들이라는 의미에서 자유학예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기원전 1세기에 로마의 학자 바로(Varro)가 의학과 건축을 여덟번째와 아홉번째 학예로 주창한 바 있지만, 그것은 이후의 학자들에 의해서 직업적 과목으로서 간주되어 교과과정으로부터 배제되었다.
중세인들에게 트리비움과 콰드리비움의 공부는 세계의 다양한 현상을 분리된 실재가 아닌, 하나의 상호 연관적인 세계 질서의 요소로 보기 위한 것이었고, 특히 콰드리비움의 네 과목들은 각기 분리된 것이 아니라 측량과 비례의 개념에 의지해 상호 연관되는 일련의 현상에 대한 과목으로 이해되었다.
콰드리비움이라는 명칭은 일곱 개의 자유학예 교육제도를 정립시킨 것으로 알려진, 중세 철학자이자 당시에 가장 권위 있는 음악 이론가였던 보에티우스(Anicius Manlius Severinus Boethius, 480경~524)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음악이 콰드리비움의 틀 안에 위치하는 것은 정수·기하·천문학·음악을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아 음악을 수리적 관점에서 이해했던 피타고라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고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인들과 마찬가지로 중세인들에게도 음악 구조의 핵심적 구성요소는 수·비율 그리고 비례였고, 따라서 음악은 예술(Ars)인 동시에 학문(Scientia)이었으며, 중세 유럽의 수도원과 대학에서 음악은 음예술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학문이론으로서 교수되었던 것이다.
보에티우스가 저술한 〈음악의 원리(De Institutione Musica)〉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음악적 사고를 가장 논리적으로 요약해놓은 음악 이론서로서, 유럽의 대학과 수도원에서 천 년 이상이나 음악 교과서로 널리 사용되었다.
보에티우스는 〈음악의 원리〉의 서장 부분에서 여러 그리스 철학자들, 특히 피타고라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유래된 음악(musica)의 개념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음악을 무지카 문다나(Musica Mundana), 무지카 후마나(Musica Humana), 그리고 무지카 인스트루멘탈리스(Musica Instrumentalis)의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보에티우스의 이 같은 음악 분류법은 중세 음악관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고대 그리스 이론가들처럼 음악의 수학적인 면과, 우주와 음악 사이의 대우주적-소우주적 관계를 강조한 것이다. 중세인들은 현상으로서의 음악의 배후에는 천체나 인간, 즉 대우주나 소우주의 질서가 상징되고 있으며, 결국 음악은 실제로 울려퍼지는 소리를 초월하여 우주와 인륜의 근본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세 가지 유형의 음악에서 가장 높은 단계의 음악은 무지카 문다나이며, 이는 ‘천체의 음악’ 또는 ‘우주의 음악’을 뜻한다. 이것은 천체나 지구, 즉 대우주가 만들어내는 음악으로, 별과 행성의 움직임, 계절의 교체, 그리고 불·흙·공기·물과 같은 네 가지 원소들의 혼합에서 관찰할 수 있는 정연한 수적 관계로서, 대우주의 조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무지카 문다나는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음악이다.
그 다음 단계인 무지카 후마나는 ‘인간의 음악’이라는 뜻으로, 인간의 정신과 육체, 즉 소우주를 다루는 음악으로, 우주의 질서에 의해서 영향받는 육체와 영혼 및 그들 각 부분들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이다. 무지카 후마나 역시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음악이다.
이 세 유형들 중 가장 낮은 단계는 무지카 인스트루멘탈리스로, ‘악기의 음악’ 또는 ‘도구의 음악’을 의미한다. 이는 음향학적 원칙들의 질서 있는 적용에 의해서 사람의 목소리를 포함한 모든 악기가 만들어내는, 즉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음악이다. 무지카 인스트루멘탈리스는 음악적 음정의 숫자 비율로 질서의 원리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가 음악 예술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이 무지카 인스트루멘탈리스를 세번째 범주인 가장 낮은 범주에 넣은 것은, 당시 중세인들이 음악을 감정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지식의 대상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에티우스는 또한 음악인도 노래나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가, 가사와 음악을 묶는 작곡가, 그리고 관조적이고 이성적 원칙에 따라서 악기의 연주와 성가를 판단할 수 있는 이론가의 세 종류로 구분했다.
보에티우스는 음악을 이성과 감각을 모두 사용하여 수많은 높고 낮은 소리들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기술로 보았으며, 따라서 진정한 음악인이란 ‘왜’보다는 단지 ‘어떻게 하는가’만을 아는 가수나 연주자, 또는 단순히 영감을 받은, 그러나 사고하지 않는 작곡가가 아니라, 음악의 구조와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고 연주와 곡을 판단하는 능력을 가진 음악 이론가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즉, 중세에 무지쿠스(musicus)란 현대에는 오히려 음악학자로 구별하고 있는 음악 이론가를 일컫는 말이었고, 오늘날 우리가 음악가라고 부르는 일반 가수나 연주자는 당시에는 칸토르(cantor)라는 말로 구별되었다. 따라서 중세의 음악적 교육도 두 가지 종류로, 칸토르를 위한 실제적 훈련과 무지쿠스를 위한 이론적 교육으로 나뉘어져서 행해졌다.
기보체계가 발달하기 이전에 칸토르들은 수도원이나 학교에 딸린 가창학교에서 전례 성가 레퍼터리를 암기하기 위한 장기간의 견습 훈련을 받아야 했고, 기보체계가 발달한 이후에는 음악 필사본을 읽기 위한 기보체계의 습득이나, 선율을 올바르게 읽는 데 직접적으로 필요한 음계이론 등, 어느 정도의 이론적 교육을 받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연주라는 실제적 목표를 위한 것이었다. 반면, 무지쿠스를 위한 음악교육은 더 고차원적인 교육의 한 부분으로서, 철학이나 신학 공부를 위한 지적인 준비로서의 음악교육이었다.
음악을 수학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고, 음악을 세 단계로 나누며, 음악예술을 음악학문보다 하위에 놓고, 창작능력을 이론지식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등, 중세의 일반적인 음악관은 대체로 그리스 인들로부터 이어받은 것으로, 르네상스 시대까지도 이러한 관점은 지배적이었다.
연관목차
서양음악사 100장면 10/118
- 서양음악사 100장면
- 고대의 음악에서 바로크 음악까지
- 계몽주의 음악에서 현대음악까지
출처
제공처 정보
서양음악사 100장면 2002. 7. 20. 책보러가기
<서양음악사 100장면> 시리즈 제2권. 18세기 초부터 20세까지의 고전주의-낭만주의-현대음악을 다루었다. 250여 년에 걸쳐 서양음악사에서 일어난 다양하고 중요한 사건들을 작곡가, 음악 장...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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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을미
박을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 졸업.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석사 및 박사(음악학). 현재 부산대학교 교수. 주요 논문 및 저서로는 <중세 서양음악의 기보발전사> <트루바두르-트루베르 음악의 리듬이론 : 모드리듬론과 자유...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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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용환
서울대 음대 기악과 졸업.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교 음악학 석사(MA) 및 박사(Ph. D). 독일 헤센 국립 음악 아카이브 연구원 역임. 문체부 남북문화분야 전략연구팀 상임연구위원 역임.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연구소 연구위원...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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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처 가람기획
[네이버 지식백과] 자유학예와 무지카 (서양음악사 100장면, 2002. 7. 20., 박을미, 김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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